프란시스코 고야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판화가로, 왕실 초상화가로 활동하면서도 전쟁과 인간의 고통을 사실적이고 강렬한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전쟁의 비극, 인간의 고통, 정치적 억압을 작품 속에 생생하게 담아내며, 당시 스페인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고발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야의 대표작 다섯 점을 통해 그의 작품 속에 숨겨진 시대적 아픔을 살펴봅니다.
1. 1808년 5월 3일 (1814년) – 무자비한 학살의 현장
고야의 ‘1808년 5월 3일(The Third of May 1808)’은 스페인 독립 전쟁 당시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 민중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마드리드 외곽의 한 언덕에서 프랑스 군인들이 스페인 민중을 총살하는 장면을 강렬한 명암 대비로 표현했습니다.
화면의 중앙에는 하얀 셔츠를 입은 남성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습니다. 그는 총을 겨누고 있는 프랑스 군대 앞에서 순교자 같은 자세로 서 있으며, 그의 얼굴은 공포와 절망에 가득 차 있습니다. 고야는 이 남성을 통해 순수한 희생자와 종교적 상징을 결합시켰습니다. 그의 두 팔은 마치 십자가를 연상시키며, 이는 예수의 희생과 민중의 억울한 죽음을 연결하는 상징적 장치로 해석됩니다.
왼쪽 바닥에는 이미 총살당한 시체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고, 오른쪽에는 총검을 든 프랑스 군대가 어둠 속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습니다. 고야는 군인의 얼굴을 어둠 속에 숨겨, 그들이 비인간적인 폭력의 대명사로 표현되도록 했습니다. 이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극명히 대비시키는 장치로, 인간성과 잔혹함의 대조를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2. 전쟁의 참상 (1810-1820년) – 인간의 잔혹성과 고통의 기록
고야는 ‘전쟁의 참상(The Disasters of War)’ 연작을 통해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을 침략하며 자행한 잔혹한 전쟁의 현실을 82점의 판화로 기록했습니다. 이 시리즈는 전쟁 중 발생한 학살, 강간, 약탈, 기아 등의 잔인한 장면들을 묘사하며, 고야는 이를 통해 전쟁이 초래한 인간성 상실과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첫 번째 작품 ‘이것이 할 일인가?(This is What You Were Born For)’에서는 나체의 시체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그 위로 군인들이 서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고야는 전쟁의 무의미함과 비인간적 폭력성을 강조합니다.
또 다른 작품 ‘나는 그것을 보았다(I Saw It)’에서는 한 여성이 강제로 끌려가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녀의 표정은 공포와 절망에 가득 차 있으며, 그녀를 끌고 가는 군인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냉혹하게 묘사되었습니다. 고야는 이 연작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스페인 민중이 겪은 고통을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3. 거인 (1818년) – 공포와 두려움의 상징
고야의 ‘거인(The Colossus)’은 거대한 인물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으로, 이는 스페인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그림 속 거인은 눈을 감고 주먹을 쥔 채로 서 있으며, 그의 발 아래에는 작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혼란 속에서 도망치고 있습니다.
고야는 이 거인을 통해 압도적인 공포와 억압을 표현했으며, 당시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과 정치적 혼란을 암시했습니다. 거인의 표정은 무표정하거나 고통스러워 보이며, 이는 폭력과 공포가 지배하는 시대를 상징합니다. 주변의 인물들은 서로 부딪히며 혼란에 빠져 있으며, 이는 사회적 혼란과 인간의 무력함을 표현하는 장치로 해석됩니다.
4. 마드리드의 두 노인 (1819-1823년) – 어두운 시대의 초상
고야의 ‘마드리드의 두 노인(Two Old Men)’은 검은 그림(Goya’s Black Paintings) 시리즈 중 하나로, 그의 말년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두 명의 노인이 어둠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서 있고, 다른 노인은 입을 크게 벌린 채 비명을 지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이 두 인물은 고야가 경험한 고통과 고독,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합니다. 고야는 이 작품에서 어둡고 두꺼운 붓질을 통해 암울한 분위기를 극대화했으며, 인물들의 눈은 검고 공허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고야가 말년에 겪은 고립감과 정신적 고통을 반영하는 요소로, 그의 내면적 절망과 공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5. 카를로스 4세 가족 초상화 (1800년) – 왕실의 위선적 면모
고야는 왕실 화가로서 스페인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겉으로는 왕실의 화려함과 권위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야는 그 안에 숨겨진 비판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왕비 마리아 루이사는 그림의 중심에 서서 가족의 주도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으며, 왕은 한 발 물러나 있습니다. 고야는 왕실의 인물들을 가식적이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묘사하여 그들의 무능함과 부패를 풍자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고야가 당시 왕실의 타락과 무능함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결론
고야의 작품은 단순한 회화가 아닌, 스페인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기록한 시각적 연대기입니다. 그는 전쟁의 참상과 억압받는 민중의 고통을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그려내며, 당시 사회의 폭력성과 부조리함을 고발했습니다. 고야는 작품 속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을 통해 인간의 절망과 공포를 극대화시켰으며, 이는 관객에게 강렬한 심리적 충격을 전달합니다.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전쟁과 인간의 고통, 권력의 부조리함을 묵직하게 환기시키며, 현대 미술사에서 여전히 강렬한 울림을 남기고 있습니다.